기존 금융기관과 기업간 협력 모델 다양화 필요
크립토 산업의 본질적 가치 '탈중앙화' 과제
▣ 미국 크립토 기업의 '은행 인가' 러시
글로벌 크립토 산업에 전례 없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리플(Ripple)*과 서클(Circle)*이 연이어 미국 통화감독청(OCC)에 은행 인가를 신청하며, 암호화폐 기업들이 제도금융권 본격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닌 크립토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서클과 리플의 은행 인가 신청은 스테이블코인 규제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미국 의회가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주요 크립토 기업들은 규제 준수를 통한 사업 정당성 확보와 동시에 금융 인프라 사업으로의 확장을 노리고 있다. 특히 리플의 경우 미국 통화감독청(OCC)으로부터 전국 신탁 은행* 인가를, 연방준비제도(Fed)로부터 마스터 계좌*를 신청하며 본격적인 은행업 진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 리플(Ripple):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 및 금융 솔루션을 제공하는 미국 핀테크 기업
* 서클(Circle): 미국 달러에 1:1로 연동된 디지털 자산, USDC(USD Coin,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사
* 신탁 은행(National Trust Bank): 미국 금융 규제 체계에서 특정 자산(예: 암호화폐, 스테이블코인준비금 등)의 보관·관리, 기관 고객 대상 커스터디(수탁)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은행 유형.
* 연방준비제도(Fed) 마스터 계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Fed)가 제공하는 중앙은행 직접 결제 계좌로, 은행 등 금융기관이 연준의 결제 시스템(예: Fedwire, ACH 등)에 직접 접근해 자금 이체, 결제, 정산 등을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계좌. 기존 상업은행을 거치지 않고 중앙은행의 결제 인프라를 직접 이용할 수 있어, 신속하고 효율적인 금융서비스 제공이 가능해 진다.
▣ 미국의 변화: 스테이블코인 규제와 사업 모델의 진화
미국 크립토 산업의 제도화는 단순히 규제 준수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전반의 사업 모델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2025년 상반기, 미 의회에 발의된 GENIUS Act(Guiding and Establishing National Innovation for U.S. Stablecoins Act)는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에 대한 최초의 연방 단위 규제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격, 100% 준비금 요건, 투명한 공시, 소비자 보호, 파산 시 우선 변제 등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며, 연방과 주 단위의 이중 감독 체계를 도입한다. 이런 환경 변화 속에서, OCC(통화감독청) 인가는 크립토 기업들에게 새로운 사업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Circle, Ripple 등 주요 기업들은 최근 전국 신탁은행(Trust Bank) 인가를 신청하며, 기존의 단순 거래소·지갑 서비스에서 벗어나 커스터디(수탁), 자산 토큰화, 결제 인프라 구축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들이 추진하는 Trust Bank 모델은 상업은행과 달리 예금·대출 기능 없이, 디지털 자산 준비금 관리와 커스터디에 특화된 금융기관으로, 해당 인가를 받으면 연방준비제도 결제망에 직접 접근할 수 있어, 기존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 실시간 결제·정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크립토 기업이 전통 금융 인프라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미국 내 디지털 자산 산업의 경쟁 구도를 크게 바꾸고 있다.
▣ 한국은 지금: 한미 크립토 산업 제도화의 비교와 전망
한국과 미국은 크립토 산업의 제도화에서 서로 다른 전략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가 중심’의 상향식(바텀업) 모델을 채택해, 크립토 기업들이 직접 금융 인프라의 일부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향식 제도화는 혁신성과 경쟁력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크립토 기업이 은행 인가를 통해 기존 금융기관의 중개 없이 직접 결제·정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의 경쟁력도 크게 강화된다. 실제로 Circle, Ripple 등은 Fed 마스터 계좌를 신청해, 기존 상업은행을 거치지 않고도 실시간 결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법제화 및 감독 강화’의 하향식(톱다운) 접근을 택하고 있다. 2025년 하반기 통과를 목표로 국회에 발의된 디지털자산 기본법과 복수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들은, 크립토 산업을 기존 금융 시스템 내에서 규율하려는 방향이 뚜렷하다. 예를 들어, 민병덕 의원안과 강준현 의원안 등은 모두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되, 자본금 요건(5억~10억 원), 준비금 관리, 금융당국 인가 등 엄격한 진입 장벽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하향식 모델은 시장의 급격한 변동성을 최소화하고, 기존 금융 시스템과의 조화를 통해 시스템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 유리하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기회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지만,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상당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고도화된 IT 인프라와 금융 기술을 바탕으로 아시아 지역 크로스보더 결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카카오, 업비트, 신한은행 등 주요 기업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커스터디, 글로벌 결제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 정책적 시사점과 발전 방향
한국 크립토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책적 측면에서 몇 가지 전략적 과제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우선, 한국 크립토 산업의 혁신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의 경직된 규제 틀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필수적이다. 금융위원회가 제시한 ‘디지털금융 혁신 로드맵’에서 강조하듯,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적극 확대해 신기술·신사업 모델이 실제 시장에서 실험되고 검증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블록체인 기반 결제,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토큰증권(RWA) 등 다양한 서비스가 규제 샌드박스 안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혁신 서비스의 상용화 가능성을 높이고, 규제 개선의 실질적 근거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샌드박스 참여 기업이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금융·법률·기술 지원 등 후속 인프라도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둘째, 인재 양성 및 기술 개발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 분야는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 경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금융위원회 등은 전문 인재 양성과 연구개발(R&D) 지원을 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학·연구기관과의 산학협력, 블록체인·스마트컨트랙트 등 실무 중심의 교육과정 확대, 글로벌 인재 유치, 민간 주도의 인재 재교육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의 R&D 펀드 조성, 민간 투자 유인책, 글로벌 해커톤·챌린지 개최 등, 한국이 기술력과 인재풀에서 글로벌 선도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글로벌 스탠다드와의 정합성도 빼놓을 수 없다. 크립토 산업은 본질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네트워크 산업이다.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국회 정무위원회 등은 미국, 유럽, 싱가포르 등 주요국의 규제 동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국제기구(IMF, IOSCO 등)와의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한국은 자체적인 규제 체계를 구축하되, 글로벌 호환성과 상호인정이 가능한 규제 프레임워크를 지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스테이블코인 준비금 기준, AML(자금세탁방지)·KYC(고객확인) 정책, 디지털 자산 회계 기준 등에서 국제 표준과의 정합성을 확보해야 글로벌 거래소·기업들과의 협력과 시장 진출이 원활해질 수 있다. 또한, 국제 표준화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고, 글로벌 규제 논의의 주도권을 일부 확보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존 금융기관과 크립토 기업 간의 협력 모델을 다양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한국에서는 미국처럼 크립토 기업이 직접 은행 인가를 받아 독립적으로 금융 인프라에 진입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따라서 은행, 증권사 등 기존 금융기관과 크립토 기업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중요한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은행-거래소 공동 커스터디 서비스, 디지털자산 기반 결제 인프라 연동, 블록체인 기반 해외송금, 토큰증권 유통 플랫폼 구축 등 다양한 협력 모델이 가능하다. 이러한 협력은 크립토 기업에 제도권 신뢰를 부여하고, 금융기관에는 신성장 동력을 제공하는 상생 구조를 만들어낸다. 정부는 이 같은 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과 인센티브 정책을 마련하고, 규제기관-산업계-학계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를 통해 실질적 협력 방안을 도출해야 한다.
미국의 은행 인가 러시와 한국의 법제화 추진은 모두 이 산업이 실험적 단계를 넘어 주류 금융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도화 과정에서 크립토 산업의 본질적 가치인 탈중앙화와 혁신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규제 준수와 혁신 추진, 안정성 확보와 경쟁력 제고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한국 크립토 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규제를 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혁신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제도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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