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게임사 크래프톤은 글로벌 흥행작 '배틀그라운드(PUBG)'로 알려진 기업이다. 정교한 게임 시스템 설계와 리얼리즘 기반의 시뮬레이션 기술로 성장해 온 크래프톤은, 그동안 게임 엔진과 아트 파이프라인의 기술 내재화를 통해 국내 게임 산업의 기술적 기준을 끌어올린 회사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 크래프톤이 2025년 10월, 새로운 방향을 선언했다. 회사는 ‘AI-First 기업’으로의 전환을 공식 발표하며, 약 1,000억 원(미화 약 7천만 달러) 규모의 GPU 클러스터 구축 계획을 공개했다. 이는 단순히 게임 개발 효율을 높이기 위한 기술 투자 수준을 넘어, AI를 조직의 핵심 엔진으로 삼겠다는 전략적 선언이었다.
이 움직임은 해외 주요 매체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The Verge, PC Gamer, Windows Central 등은 이번 결정을 두고 “크래프톤이 더 이상 단순한 게임 스튜디오가 아니라, AI 인프라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AI를 하나의 개발 도구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조직 구조·문화·생산 파이프라인 전체를 AI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게임 개발사가 스스로를 ‘AI 기업’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콘텐츠 산업의 경계를 새로 그리는 선언이자 “게임 기업이 인공지능 기업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질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크래프톤의 ‘AI-First’ 전략, 무엇이 다른가
크래프톤의 ‘AI-First’ 전략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기업의 핵심 인프라와 조직 구조, 개발 문화 전반을 AI 중심으로 재편하는 체계적 전환에 가깝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인프라 확보다. 크래프톤은 약 1,000억 원 규모의 GPU 연산 클러스터 구축을 공식화하며, AI 연구·게임 시뮬레이션·에이전트 트레이닝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자체 인프라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외부 API를 활용해 AI 기능을 단순히 ‘빌려 쓰는’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 AI를 학습시키고 배포할 수 있는 연구형 기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해외 매체 Tech in Asia와 KoreaTechDesk는 이를 “한국 게임산업의 차세대 기술 인프라 구축”으로 평가하며, 크래프톤이 AI의 소비자(client) 가 아니라 AI를 훈련시키는 프로바이더(provider) 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직과 개발문화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크래프톤은 사내 연구조직인 AI Lab을 중심으로, 게임 아트·애니메이션·QA·운영 등 거의 모든 부문에 생성형 모델과 AI 에이전트 시스템을 내재화하고 있다. 내부 툴체인과 데이터 파이프라인은 AI 자동화에 맞게 재설계되고 있으며, 이미 NPC 대화와 행동 설계, 시뮬레이션 테스트, QA 자동화, 월드빌딩 지원 시스템 등이 적용 단계에 있다. 이는 “AI가 보조하는 개발”을 넘어 “AI와 협업하는 개발”로의 전환이며, 결과적으로 게임 개발의 노동 구조와 창작 프로세스 자체를 재구성하는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크래프톤이 이제 단순한 게임 개발사를 넘어 AI·시뮬레이션·IP 기술기업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적으로는 개발 효율과 품질을 높이기 위한 내부 혁신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게임을 넘어 AI 기반 콘텐츠 제작 툴, IP 운영 플랫폼, 지능형 시뮬레이션 서비스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크래프톤이 “AI를 활용해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게임을 통해 AI를 실험하고 진화시키는 회사”로 변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번 ‘AI-First’ 전략은 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AI를 적용하는 사례가 아니라, AI라는 인프라 위에 게임과 콘텐츠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AI를 쓰는 회사”에서 “AI로 생각하는 회사”로
크래프톤의 ‘AI-First’ 전략이 주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기술 채택의 수준이 아니라 사고 구조의 전환에 있다. 대부분의 기업이 AI를 업무 자동화나 효율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반면, 크래프톤은 AI를 조직의 작동 원리이자 의사결정의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AI는 도입되는 기술이 아니라, 조직의 사고방식 자체를 재구성하는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이 전환은 단순한 기술 혁신보다 훨씬 깊은 구조적 함의를 가진다. 기존의 게임 개발은 인간 중심의 아이디어와 경험, 직관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AI-First 전략에서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적 사고가 크리에이티브 의사결정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예를 들어 크래프톤의 개발 파이프라인은 이미 ‘AI-Lab’을 통해 생성형 모델, 대화형 에이전트, 데이터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내재화하고 있으며, 이는 게임 기획·아트·운영 전반에서 인간의 판단 구조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곧 크리에이티브 산업의 조직 문화가 어떻게 진화할지를 보여주는 시그널이다.
‘AI를 사용하는 조직’은 효율을 추구하지만, ‘AI로 사고하는 조직’은 창작의 속성과 리스크, 그리고 가능성의 구조 자체를 재정의한다. 이는 예술적 직관과 기술적 예측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창작 조직 모델이며, 크래프톤은 그 첫 사례가 되고 있다.
‘게임 엔진’에서 ‘AI 엔진’으로
과거 게임 엔진은 세상을 보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물리·렌더링 시스템이었다. 엔진은 조명과 텍스처, 캐릭터의 충돌과 움직임을 계산하며 ‘가상의 현실’을 재현했다. 그러나 AI의 등장으로 이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엔진은 단순히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생각하고 반응하는 원리를 담는 인지적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크래프톤의 GPU 클러스터는 바로 이 패러다임 전환의 상징이다. 회사가 구축 중인 연산 인프라는 그래픽 렌더링용 자원이 아니라, AI 모델 학습·에이전트 시뮬레이션·서사적 행동 예측을 위한 ‘지능 훈련소’에 가깝다. 다시 말해, GPU 클러스터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서버가 아니라, AI형 게임 엔진의 토대, 즉 ‘세계의 지능을 훈련시키는 실험실’로 해석된다.
이 변화는 게임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꾼다. 전통적인 게임 엔진은 미리 정의된 규칙과 자산(asset)을 실행했지만, AI 엔진은 플레이어의 선택과 감정, 환경의 변수를 학습하고 실시간으로 세계의 상태를 재구성한다. 그 결과 게임은 더 이상 “프로그래밍된 세계”가 아니라, AI의 인식과 판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살아 있는 세계’로 변모한다. 이는 크래프톤이 단순히 게임 개발사가 아니라, 지능형 시뮬레이션을 설계하는 기술 기업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핵심 징후다.
‘AI 콘텐츠 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카테고리의 탄생
크래프톤의 'AI-First' 전략은 결국 “AI + 콘텐츠”의 병렬적 조합이 아니라, “AI = 콘텐츠”라는 등식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AI가 콘텐츠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 그 자체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콘텐츠의 본질은 ‘완성된 결과물’이었다. 하나의 게임, 한 편의 영화, 한 곡의 음악처럼 고정된 형태로 소비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AI가 개입한 순간, 콘텐츠는 더 이상 고정되지 않는다.
AI는 사용자의 상호작용, 감정 상태, 행동 패턴을 학습하며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크래프톤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명확하다.
AI를 게임 개발의 보조수단으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AI가 콘텐츠의 본질을 재정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향후 게임이나 미디어는 ‘한 번 만들어 판매하는 제품’이 아니라, AI가 지속적으로 생성·진화시키는 경험적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 안에서 크래프톤은 더 이상 단순한 게임 퍼블리셔가 아니라, AI가 만들어내는 경험의 생태계를 설계하는 기업, 즉 ‘AI 콘텐츠 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 유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는 한국 콘텐츠 산업 전반에도 중요한 함의를 남긴다.
그동안 한국형 게임 기업은 기술보다는 창의성, 서비스보다는 운영 효율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AI 인프라 구축력과 데이터 운영 능력이 창작의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크래프톤의 행보는 한국 콘텐츠 산업이 AI 인프라와 창작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융합지대(Convergence Frontier) 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즉, AI는 더 이상 창작을 돕는 기술이 아니라, 창작의 주체이자 산업의 토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형 AI 전략의 가능성과 한계
크래프톤의 ‘AI-First’ 선언은 또한 단일 기업의 실험을 넘어, 한국 게임 산업 전체가 글로벌 AI 경쟁에서 본격적으로 선제적 베팅을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한국은 이미 K-게임이라는 확고한 글로벌 콘텐츠 브랜드(PUBG, 리니지, 메이플스토리 등)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AI 인프라와 결합할 수 있는 기반도 갖추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와 SK그룹의 반도체·데이터센터 생태계는 AI 모델 학습과 GPU 인프라 확보 측면에서 강력한 지원망이 될 수 있다.
크래프톤의 대규모 GPU 클러스터 투자는 단순히 기업 차원의 선택이 아니라, 국내 AI 하드웨어-콘텐츠 생태계의 수직적 연계 가능성을 시험하는 의미를 가진다.
나아가, 이러한 흐름은 엔씨소프트, 넥슨, 넷마블 등 다른 대형 게임사들의 AI 연구소 설립 및 투자 확대를 자극할 촉매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가능성과 함께 현실적인 제약도 명확하다. 무엇보다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OpenAI, Google DeepMind, Anthropic, NVIDIA 등 글로벌 AI 플랫폼 생태계에 대한 기술·API 의존도가 높다.
즉, 인프라를 구축한다 해도 코어 모델과 프레임워크 레벨의 독자성은 확보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크래프톤이 “AI로 게임을 설계한다”는 비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AI-First가 곧바로 ‘게임의 재미’나 ‘창의성’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AI가 설계한 월드와 캐릭터가 인간 디자이너의 서사적 감수성을 대체할 수 있는지는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나치게 데이터 중심의 개발 프로세스가 인간 창작자의 역할을 축소시킬 위험도 존재한다.
결국 크래프톤의 시도는 “한국형 AI 전략”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게임 산업이 기술적 야심과 창의적 정체성을 함께 품은 형태로 진화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흐름이 단기적 유행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산업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AI 인프라가 세계를 만드는 도구가 될지, 혹은 또 하나의 기술 과시로 남을지는 이제부터의 실험이 결정지을 것이다.
게임사가 AI 기업이 되는 시대 크래프톤의 'AI-First' 선언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게임 개발사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전환점이다. AI를 개발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조직과 창작의 핵심 원리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이 변화는 게임의 개념 자체를 바꾼다. 게임은 더 이상 완성된 상품이 아니라, AI가 학습하고 반응하며 스스로 진화하는 살아 있는 시스템이 된다. 플레이어의 행동과 감정, 세계의 서사 구조가 AI를 통해 실시간으로 재구성되며, 게임은 "개발이 끝난 작품"에서 "AI와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로 전환된다.
창작자의 역할도 달라진다. 이제 개발자는 "어떤 사운드와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설계하게 된다. AI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세계의 지능과 감정을 함께 구축하는 동반자가 된다.
크래프톤은 이 전환의 최전선에 서 있다. 게임사가 AI 기업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기술 기업이 감정을 설계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새로운 창작자가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실험실이다. 이 실험은 한국 게임 산업이 AI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사례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 META-X.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