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은 어떻게 포스트달러 전략에 진입하는가
이정민 기자
dave126999@gmail.com | 2025-07-18 11:00:28
신흥국 디지털화폐 실험...‘비서구 디지털화폐’ 블록 가능성 부상
파키스탄 중앙은행(State Bank of Pakistan)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위한 파일럿 프로그램 개시를 공식화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파키스탄이 디지털 금융 인프라 재편에 착수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행보는 나이지리아의 e-나이라, 인도의 디지털 루피, 중국의 e-CNY에 이어 비서구권 신흥국들이 디지털 통화를 실험하며 금융 질서 재구성에 나서는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이번 발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파키스탄은 디지털 루피를 통해 현금 기반의 비공식 경제에 의존하던 저소득층과 비은행권 시민에게 디지털 금융 접근성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적 의지를 내비쳤다.
둘째, 이러한 화폐 실험은 단순한 전자 결제를 넘어 국가 통화 주권 확보 및 외환 의존도 축소라는 장기적 과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학적 함의를 동반한다.
현금 의존 구조 속 ‘금융 포용’ 실험의 가능성
파키스탄이 추진 중인 CBDC 파일럿은 금융 포용 확대를 포함한 다층적 정책 목적을 담고 있다. 특히, 비공식 경제 비중이 높은 구조, 낮은 은행 계좌 보유율, 현금 중심의 결제 관행 등은 디지털 금융 전환 논의의 주요 배경으로 지목된다. 2024년 기준 파키스탄 성인의 은행 계좌 보유율은 약 21% 수준에 그치며, 금융 접근성의 지역·소득별 격차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파키스탄의 CBDC는 디지털 기반의 대안 결제 수단으로서 일부 제약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모바일 기기를 활용한 디지털 루피 지갑이 기술적으로 구현되면 은행 계좌를 보유하지 않은 시민이 보조금 수령, 일상 결제, 세금 납부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는 금융 생태계 내 비포용 계층을 점진적으로 편입시키는 수단으로 검토될 수 있다. 그 정책적 실효성은 향후 설계 방식과 도입 범위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파키스탄의 접근 방식은 인도의 디지털 루피 및 통합 결제 인터페이스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인도는 디지털 결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소액 금융거래의 기록화, 신용 정보 생성, 복지 지급의 전자화 등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인도의 디지털 접근 방안은 디지털 통화의 사회경제적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례로 평가된다.
위의 사항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파키스탄의 CBDC 파일럿은 현금 중심 결제 구조를 점진적으로 전환하려는 초기적 실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실질적 전환 효과는 기술 접근성, 시민 신뢰도, 제도 연계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구체적 성과는 중장기적 관찰이 필요하다.
‘비서구 디지털화폐’ 블록 가능성의 부상
파키스탄의 CBDC 실험은 단지 사회보장 수단의 디지털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는 금융 포용이라는 내부 목표를 넘어 국제 금융 질서에서의 자율성과 전략적 여지를 모색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미국 달러 기반의 무역 결제 구조와 SWIFT 중심의 금융 메시징 인프라가 지정학적 제재 수단으로 작동해 온 전례를 고려할 때, 일부 국가들은 자체 통화 네트워크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Belt & Road 참여국들과의 무역·투자 거래에서 e-CNY의 점진적 사용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역외송금 수수료 절감을 목적으로 e‑Naira를 도입해 일부 성과를 보고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이들 국가와 유사한 맥락에서 디지털 통화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비서구권 국가 간 정책 동조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키스탄이 시도하는 CBDC는 단순한 기술 기반 결제 수단을 넘어서 국가의 통화 정책 자율성을 확장하고 외환 리스크에 대응하는 보완적 수단으로서 검토될 수 있다. 특히 통화 주권 확보와 지정학적 다양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신흥국들 사이에서 CBDC는 외교·경제적 전략 자산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CBDC 시험대에 선 파키스탄, 가능성과 긴장의 교차로
CBDC 도입을 공식화한 파키스탄은 현재 금융 포용이라는 구조적 과제와 통화 주권이라는 전략적 목표 사이에서 신중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 실험은 단지 기술 도입이나 사회보장 전달 방식의 개선을 넘어 디지털 통화를 활용한 정책 자율성 확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파키스탄의 사례가 향후 신흥국 디지털 통화 모델의 하나의 준거점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설계와 실행 과정을 통해 비서구권 국가들이 직면한 제도적 기회와 제약을 함께 드러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루피는 이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닌 금융 인프라 재구성의 시험대 위에 놓인 하나의 정책 도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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