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ASEAN과 함께 각국 현지 언어를 학습한 인공지능(AI)을 공동 개발하는 구상에 본격 착수한다. 첫 협력 대상은 캄보디아로, 공용어인 크메르어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언어모델(LLM) 개발을 지원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이번 협력은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AI를 외교·산업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일본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영어와 중국어 중심으로 고도화돼 온 기존 AI 질서에서 벗어나, 비주류 언어권을 포괄하는 새로운 협력 축을 만들겠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글로벌 AI 생태계는 영어와 중국어 데이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 결과 크메르어, 라오어, 미얀마어 등 ASEAN 다수 국가의 언어는 AI 서비스 접근성과 품질에서 구조적 한계를 겪어왔다. 일본은 이 지점을 ‘기술 격차’이자 ‘외교 기회’로 보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시작되는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모델을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 언어 데이터 구축과 공공 행정·교육·보건 분야에 활용 가능한 LLM 개발, 현지 연구 인력 양성과 인프라 지원을 함께 묶은 AI 생태계 패키지형 협력에 가깝다. 장기적으로는 현지에서 스스로 AI를 개선·운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캄보디아가 첫 파트너로 선택된 배경에는 기술 수요와 지정학적 계산이 동시에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캄보디아는 디지털 전환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자국어 기반 AI 역량은 제한적인 국가다. 동시에 중국과의 경제·정치적 연계가 강한 국가이기도 하다. 일본은 현지어 AI 지원을 통해 개발 협력이라는 명분을 확보하는 동시에, 중국 기술 의존도를 완화할 대안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 같은 접근은 미·중 전략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ASEAN 국가들에게도 현실적인 선택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미국처럼 규범 중심의 강한 압박을 앞세우지도, 중국처럼 대규모 자본과 폐쇄적 생태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현지 언어 존중과 공공 목적 중심의 AI 활용, 공동 개발과 인재 양성을 강조한다. 이는 일본이 ODA와 기술 협력을 통해 축적해온 ‘신뢰 기반 외교 자산’을 AI 영역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이번 구상은 일본 AI 전략의 우회로로 해석된다. 초거대 범용 모델 경쟁에서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던 일본이, 비영어·비중국어 언어권 특화 모델이라는 틈새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ASEAN 각국의 현지어 AI가 일본 기술과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구축될 경우, 일본식 데이터 관리 기준과 AI 솔루션, 협력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다만 과제 역시 분명하다. 현지어 데이터의 품질과 양 확보, 각국의 정치·검열 환경에 따른 AI 운용 리스크, 이미 구축된 중국 주도의 디지털 인프라와의 경쟁은 일본 단독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캄보디아 이후 다른 ASEAN 국가로 협력이 확장될 수 있을지는 외교적 조율과 초기 성과에 달려 있다.
일본과 ASEAN의 현지어 AI 공동 개발은 기술 협력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본질은 AI를 둘러싼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의 한 장면이다. 영어와 중국어가 지배해온 AI 질서 속에서 일본은 언어 다양성과 개발 협력을 무기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캄보디아 크메르어 LLM 지원은 그 첫 단추에 불과하며,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AI는 ASEAN에서 특정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닌, 다수의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디지털 인프라로 재정의될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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