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025년에 "연대"가 가능해졌나
[메타X(MetaX)] 2025년 10월, 락스타 게임즈가 영국과 캐나다 스튜디오에서 30~4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회사 측은 기밀정보 유출을 사유로 들었다. 그러나 영국 독립노동자노조(Independent Workers’ Union of Great Britain, IWGB)의 해석은 달랐다. 해고된 직원 상당수가 노조 조직화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는 명백한 유니온 버스팅(Union Busting,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거나, 가입하거나, 활동하지 못하도록 회사가 조직적으로 방해·억제하는 모든 행위)이라는 것이다.
사건은 빠르게 확산됐다. IWGB는 부당해고 및 노동법 위반 소송을 제기했고, 런던과 에든버러에서는 테이크투 사무실 앞 시위가 이어졌다. 영국 정치권도 개입했다. 총리급 인사가 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약속하며 우려를 표명할 정도로 사안은 단숨에 국제 뉴스가 됐다.
이후, 유럽 각국의 게임 노조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조직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해온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생긴 연대가 아니다
락스타 사태에 대한 유럽 게임 노조들의 신속한 대응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7년에 걸친 조직화의 역사가 있었다.
씨앗(2018~2022)
2018년, Game Workers Unite(GWU)가 결성됐다. 크런치 문화, 불안정 고용, 프로젝트 종료 후 대량 해고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배경이었다. GWU는 특정 회사의 노조가 아니라 게임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 조직을 지향했다. "게임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내건 첫 번째 깃발이었다.
이후 각국에서 개별 조직화가 시작됐다. 영국에서는 IWGB 내에 게임산업 지부가 공식 인정받았다. 프랑스에서는 STJV(게임노동자연대조합)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독일, 스페인, 아일랜드 등에서도 소규모 모임과 워크숍 형태로 움직임이 확산됐다.
다만 이 시기의 한계는 분명했다. 대부분 자발적 네트워크 수준에 머물렀고, 실질적인 단체협약이나 파업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2023, 첫 번째 가시적 성과
전환점은 2023년 프랑스에서 왔다. Ubisoft Paris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불합리한 근로환경과 구조조정 방식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파업은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냈고, 일부 요구가 관철됐다. 이 사건의 의미는 결과 자체보다 더 컸다. 그때까지 게임 노조는 목소리는 내지만 실질적 힘은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나, Ubisoft 사례는 "조직화 → 행동 → 성과"라는 경로가 게임산업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2024~, 조용한 확산
2024년에는 대중의 관심 밖에서 중요한 변화가 진행됐다. 특히 QA(품질보증) 부서가 노조 결성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북미에서는 전국 단위의 노조 투표가 이어졌고, 유럽에서도 QA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빠르게 강화됐다.
QA 부서는 대체적으로, 게임 산업에서 가장 낮은 처우와 가장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동시에 감당해온 영역이다. 때문에 외주화와 계약직 비율이 높고, 구조조정 국면에서는 가장 먼저 조정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역설적으로, 잃을 것이 가장 적은 집단이 조직화에 가장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거치며 국가 간 노조 네트워크도 상당히 두꺼워졌다. 정기적인 온라인 회의와 정보 공유, 공동 성명 초안에 대한 논의가 수면 아래에서 꾸준히 이어졌다. 락스타 게임즈 해고 사태가 발생했을 때 유럽 각국의 노조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이 시기의 축적된 연대가 있었다.
왜 2025년에 "연대"가 가능해졌나
락스타 사태는 두 가지를 명확히 했다.
첫째, 대형 퍼블리셔의 본심이다. 락스타와 모회사 테이크투는 업계 최고 수익을 내는 회사다. GTA 시리즈 하나로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그런 회사조차 노조 활동에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온다면, 다른 회사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우리 회사는 다르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둘째, 단일 국가 대응의 한계다. 영국 IWGB가 글로벌 기업 테이크투와 홀로 싸우는 구도는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캐나다에서 함께 해고된 노동자들과의 공조가 필요했다. "국경을 넘는 자본에는 국경을 넘는 노동으로"라는 인식이 구체적인 필요로 다가왔다.
락스타 게임즈 사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유럽 각국의 게임 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사전 협의 없이 진행되는 생성형 AI의 일방적 도입, 그에 따라 바뀌는 업무 프로세스와 성과 측정 기준은 여러 국가에서 반복되는 경험이었다. 구조조정 방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종료될 때마다 대량 해고가 되풀이됐고, 팬데믹 이후 확산됐던 유연근무는 RTO(Return-to-Office)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철회되는 경우가 잦았다.
프랑스의 Ubisoft, 영국의 락스타 게임즈, 미국의 Activision Blizzard. 회사와 국적은 달랐지만, 경영진의 대응 방식은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 이 과정에서 “이것은 특정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점차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감대는 202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동을 계기로 공식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영국 IWGB, 프랑스 STJV, 독일 ver.di GDRT, 이탈리아 FIOM-CGIL, 스페인 CSVI/CGT, 아일랜드 Game Workers Unite Ireland 등 유럽 6개국 게임 노조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세 가지 요구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AI 도입 과정에서의 노동자 협의 의무화, 반(反)노동적 구조조정에 대한 공동 대응, 그리고 RTO 명령에 대한 공동 입장 정리다. 이는 각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문제 제기를 국제 공조의 틀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번 회동은 단순한 상징적 제스처에 그치지 않았다. 향후 공동 행동과 연대 파업, 공동 협상 요구까지 염두에 둔 실질적인 합의가 포함되면서, 유럽 게임 노동자 연대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행동 가능성을 갖춘 단계로 진입했다.
"노조 설립"보다 중요한 것
이번 연대를 단순히 “유럽에서 게임 노조가 늘어났다”는 프레임으로 이해하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수적인 확대보다 중요한 변화는 다른 데 있다. 게임 산업의 권력 구조를 어디에 두고 교섭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처음으로 본격화됐다는 점이다.
플랫폼 자본에 대한 집단 교섭의 시작
전통적인 노조 모델은 한 회사, 한 사업장을 단위로 교섭한다. 그러나 게임 산업의 현실은 이 전제를 이미 벗어나 있다. 실질적인 결정권은 테이크투, EA, Ubisoft 같은 글로벌 퍼블리셔에 집중돼 있고, 개별 개발 스튜디오는 프로젝트 단위로 해체되고 재편된다. 많은 경우 스튜디오는 독립 사업체라기보다 하청 구조에 가깝다.
이 구조에서 사업장 단위 노조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한 스튜디오에서 협상에 성공하더라도, 다른 스튜디오에서는 동일한 문제가 반복된다. 퍼블리셔 입장에서는 개별 스튜디오의 노조를 각각 상대하면 그만이다. 구조 자체가 분절을 전제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유럽 6개국 연대가 바꾸려는 지점은 바로 이 구도다. 국가별·사업장별 개별 협상이 아니라, 퍼블리셔 단위로 공동 압박을 가하는 교섭 프레임을 시도하고 있다. “락스타 영국”이 아니라 “테이크투 전체”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겠다는 방식이다. 성공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시도 자체가 게임 노동권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AI는 자동화가 아니라 노동 통제의 문제다
6개국 연대가 AI를 핵심 공동 의제로 삼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다만 이를 “AI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자동화 담론으로 해석하면 현장의 체감과는 어긋난다. 실제 쟁점은 AI 도입을 누가, 어떤 절차로 결정하느냐에 있다.
사전 협의 없이 업무 방식이 바뀌고, 성과 측정 기준이 재설정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노동 과정 전반에 대한 통제권의 이동을 의미한다. 현장에서 AI는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이기 이전에, 관리 방식과 평가 기준을 재편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6개국 노조가 요구하는 것도 “AI 반대”가 아니다. “AI를 도입할 때 노동자와 협의하라”는 절차적 요구다. 기술 도입의 민주화, 그리고 노동 통제에 대한 견제라는 문제의식이다. 이 프레임은 게임 산업에 국한되지 않고, 향후 테크·플랫폼 산업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식 모델의 실험
물론 미국에서도, 게임 노동권 운동은 진행 중이다. Activision Blizzard QA 노조, 마이크로소프트 산하 스튜디오 노조 등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식 모델은 기본적으로 기업별·사업장별 노조 결성에 기반한다. 개별 승리가 산업 전체의 구조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한계가 분명하다.
유럽은 다른 경로를 선택하고 있다. ver.di, FIOM-CGIL처럼 이미 존재하는 산별 노조를 기반으로, 이번에는 이 노조들 간의 국제 공조가 시도되고 있다. 목표는 명확하다. 글로벌 퍼블리셔를 상대로 초국적 교섭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도가 ‘실험’으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임 산업에서 이 정도 수준의 국제 노조 연대는 사실상 처음이다. 성공한다면 테크·플랫폼 산업 전반에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연대는 결국 상징에 그친다”는 냉소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연대 이후, 진짜 시험대
연대 이후 가장 먼저 결과가 드러날 사안은 IWGB가 제기한 락스타·테이크투 소송이다. 쟁점은 부당 해고와 노동법 위반 여부다. 승소할 경우 유니온 버스팅에 대한 법적 제재의 중요한 선례가 될 수 있고, 패소한다면 기업들의 강경 대응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소송은 영국 법정에서 진행되지만, 의미는 그 경계를 훨씬 넘어선다. 유럽 6개국 노조는 공동 성명과 연대 시위, 여론전을 통해 이 법적 분쟁을 집단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법정 투쟁과 정치적 압박을 병행하는 전략이다.
물론 공동 성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연대 파업이나 공동 협상 요구 등 실질적인 공동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이 연대는 시험대에 오른다. 각국 노동법과 노조 문화의 차이는 현실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고, 이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연대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다.
확산 가능성도 주목할 지점이다. 미국에서는 CWA(통신노조)를 중심으로 별도의 게임 노동 조직화 흐름이 진행 중이고,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게임 업계는 노동권 논의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번 유럽 연대가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신호로 작용할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긴 시간 흩어져 있던 게임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처음으로 같은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핵심은 “노조가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다. 국경을 넘는 자본에 맞서, 국경을 넘는 교섭 구조를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열려 있다.
이번 시도가 일회성 선언으로 끝날지, 아니면 플랫폼 시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을지는 이제부터의 선택과 실행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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