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X(MetaX)] 2018년 넷플릭스는 '블랙미러: 밴더스내치'로 인터랙티브 영상의 가능성을 세상에 보여줬다. 시청자가 선택지를 고르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구조였다. 화제는 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후속작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포맷 자체가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분기가 10개면 촬영도 10번 해야 했다. 제작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에서 스튜디오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했다. 유튜브도 인터랙티브 영상 기능을 도입했지만 확산되지 않았다. 만드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7년이 지난 지금, AI가 그 비용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분기가 10개면 프롬프트를 10번 입력하면 된다. 촬영팀도, 배우도, 스튜디오도 필요 없다. 밴더스내치를 만들기 위해 넷플릭스가 투입했던 자원을, 이제 노트북 한 대와 AI 툴만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상에 선택지를 붙여 게임으로
1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Phaser Studio가 ‘Beam’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플랫폼을 공식 출시했다. Beam은 스스로를 “플레이어블 비디오(playable video)” 제작 도구라고 정의한다. 게임 엔진이 아니라 영상 기반 인터랙션을 전면에 내세운 이 선택은, HTML5 게임 개발 프레임워크 ‘Phaser’로 잘 알려진 이 회사가 콘텐츠 제작의 미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Beam은 Google DeepMind의 최신 영상 생성 모델 Veo 3.1을 탑재했다. 사용자는 텍스트 프롬프트를 입력해 AI로 영상 클립을 생성하고, 이미지와 배경 음악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제작할 수 있다. 이후 Beam의 시각적 편집 도구인 ‘Grid 에디터’에서 이 클립들을 배치하고, 씬과 씬 사이에 선택지를 삽입해 분기 구조를 만든다. 선택지 A를 고르면 영상 2로, 선택지 B를 고르면 영상 3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완성된 콘텐츠는 곧바로 웹에 퍼블리시할 수 있으며, 전 과정에서 코딩은 필요하지 않다. 사실 이런 구조는 전통적인 게임 개발보다는 분기형 내러티브와 인터랙션을 결합한 영상 콘텐츠에 가깝다. 다만 Beam은 이를 단순한 ‘인터랙티브 비디오’가 아니라, 게임 제작의 한 형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기존 영상 도구들과 선을 긋는다.
Beam의 CEO Matt Dukes는 보도자료를 통해 “비디오는 인터넷의 지배적 포맷이 되었지만, 항상 수동적인 형태에 머물러 왔다”며 “Beam은 비디오를 인터랙티브한 것으로 전환한다. Veo 3.1과 노코드 게임 제작 워크플로우를 결합해, 스토리와 게임, 숏폼 콘텐츠가 수렴하는 새로운 매체를 크리에이터에게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Beam은 현재 얼리 액세스 프로그램 형태로 운영 중이며, 무제한 무료 생성을 제공한다. 한 초기 사용자는 “AI 영상 도구는 이전에도 사용해 봤지만, Beam은 처음으로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감각을 준 플랫폼이었다”며, “영상을 단순히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조작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코딩 없이 게임을 만드는 툴들이 쏟아진다
Beam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난 1년간 노코드 AI 게임 및 콘텐츠 제작 툴 시장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제작 비용과 시간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실험과 실패를 전제로 한 콘텐츠 생산이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Rosebud AI는 텍스트로 게임 콘셉트를 설명하면 AI가 초기 코드를 생성해주는 플랫폼이다. 2D와 3D를 모두 지원하며, 브라우저에서 바로 게임을 빌드하고 공유할 수 있다. 코딩 경험이 없어도 된다. FRVR이 운영하는 Upit은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2D 게임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한 사용자는 몇 달 만에 14개의 게임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Ludo.ai는 게임 기획, 아트 생성, 시장 조사까지 AI로 지원하는 올인원 도구다. 게임 콘셉트 문서 작성부터 경쟁작 분석, 아이콘 생성까지 하나의 플랫폼에서 처리할 수 있다.
이들 툴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코딩이 필요 없고, 브라우저에서 작동하며, 타깃이 전문 개발자가 아니라 일반 크리에이터라는 점이다. Roblox나 Fortnite의 크리에이티브 모드가 특정 플랫폼 안에서 UGC 생태계를 구축했다면, 이 새로운 툴들은 플랫폼 종속 없이 독립적으로 콘텐츠를 제작·배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다만 ‘노코드’가 곧 ‘설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코드가 사라진 자리에는 선택지 설계, 분기 구조, 플레이 흐름을 구성하는 내러티브 디자인이 남는다. 제작의 난이도는 낮아졌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어디서 선택하게 할 것인지는 여전히 창작자의 몫이다.
시장도 이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DC) 2025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 개발사의 50% 이상이 이미 생성형 AI를 콘텐츠 제작, 테스트, 디자인 등에 활용하고 있다. 글로벌 AI 게임 시장은 2024년 32억 8천만 달러에서 2033년 51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이 성장은 기존 AAA 게임 시장을 대체한다기보다, 지금까지 게임 산업의 외곽에 있던 크리에이터·광고·숏폼 콘텐츠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향에 가깝다.
3분짜리 게임, 숏폼의 다음 진화
여기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Beam과 유사한 툴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기존 게임은 수십 시간의 플레이타임, 복잡한 시스템, 정교한 물리 엔진을 전제로 설계된다. 반면 플레이어블 비디오는 1~3분 사이의 짧은 경험, 제한된 선택지, 분기되는 영상 클립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게임이라기보다 인터랙티브 숏폼 콘텐츠에 가깝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타깃 사용자와 소비 패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에 익숙한 세대는 15초에서 3분 사이의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들에게 40시간짜리 RPG는 진입 장벽이 높다. 하지만 3분짜리 인터랙티브 스토리는 숏폼 영상을 소비하듯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 제작 측면에서도 짧은 포맷은 실패 비용이 낮고 반복 생산에 유리하다.
Beam의 초기 크리에이터들이 제작 중인 콘텐츠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데이팅 시뮬레이션, 선택지 기반 로맨스 스토리, 분기형 그래픽 노블, ASMR 스타일 인터랙티브 경험, 힐링 펫 스토리. 이는 전통적인 게임 산업의 주류 장르라기보다, 웹툰과 인터랙티브 픽션, 틱톡 콘텐츠에 더 가깝다.
이 관점에서 보면 Beam의 경쟁자는 다른 게임 회사가 아니다. 틱톡 크리에이터, 웹소설 작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가 경쟁자다. 게임 산업의 경계가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쪽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Dukes CEO가 “AI가 이미지 창작을 열었고, 그다음 영상을 열었다. 플레이어블 비디오는 디지털 미디어 진화의 다음 단계”라고 말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발자 절반이 AI를 쓴다, 하지만 반발도 거세다
물론 이 변화를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업계의 시선은 엇갈린다. GDC 2025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 개발사의 절반 이상이 생성형 AI를 사용 중이지만, 동시에 개발자 커뮤니티 내부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2025년 11월 출시된 Embark Studios의 ‘ARC Raiders’는 일부 NPC 음성에 생성형 AI를 사용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됐다. 게임 자체는 메타크리틱 86점의 호평을 받았지만, Eurogamer는 AI 음성 사용을 이유로 5점 만점에 2점을 부여했다. 이 사례는 AI 사용 여부 자체가 비평의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모든 AI 활용이 문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구조적인 긴장도 존재한다. AI 툴이 제작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전문 개발자와 아티스트의 역할이 재정의되고 있다. 유튜브가 방송 산업의 구조를 바꿨듯, AI 기반 크리에이터 툴은 게임 산업의 노동 구조 역시 바꿀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한 우려는 이미 업계 전반에서 현실적인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7년 전 넷플릭스의 ‘밴더스내치’가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대중화하지 못했던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AI가 현실적인 제작 방식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분기마다 촬영이 필요했던 구조는 이제 분기마다 프롬프트 한 줄로 대체된다. Beam과 같은 툴이 그 결과물이다. 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이 스튜디오 중심 구조에서 개인 크리에이터의 손으로 이동하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포맷도 등장하고 있다. 기존 게임도, 기존 영상도 아닌 ‘플레이어블 숏폼’이다. 3분 안에 끝나는 인터랙티브 경험. 이는 게임의 미래라기보다, 게임이 점유하지 못했던 시간과 사용자를 겨냥한 확장에 가깝다. 게임 산업과 크리에이터 이코노미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다만 해결되지 않은 과제도 분명하다. 수익화 모델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Beam은 크리에이터 수익화 기능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세부 방안은 공개하지 않았다. AI 생성 콘텐츠의 저작권 문제, 품질 관리, 시장의 신뢰 역시 여전히 검증 단계에 있다.
AI 툴은 인터랙티브 콘텐츠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다만 밴더스내치가 남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시장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이제, 기술은 준비가 됐다. 남은 건 시장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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