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재설계로 지정학을 내재화하다
CES 2026이 막을 내린 가운데, 올해 전시의 숨은 주인공으로 중국 기업들이 다시 부상했다. 최근 몇 년간 미·중 갈등과 기술 규제로 존재감이 약화됐던 중국 기업들은 이번 전시에서 다시 전면에 등장하며, 글로벌 기술 질서가 단순한 ‘차단과 분리’ 국면을 넘어 보다 복합적인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번 등장은 단순한 복귀라기보다 전략적 재배치에 가깝다. 본사 이전, 법인 구조 재편, 생산과 유통의 분산을 통해 미국의 관세 정책과 기술 디커플링을 우회하려는 계산된 선택의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국 기업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구조를 바꿔왔음을 CES 2026이 드러낸 셈이다.
전시장에서는 일본과 일부 전통 강자가 불참하거나 존재감을 줄인 반면, 중국계 기업들은 미국·동남아·유럽 법인을 전면에 내세워 부스를 채웠다. 외형상으로는 ‘중국 기업’의 흔적이 옅었지만, 기술과 자본의 근간은 여전히 중국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국적을 기준으로 한 규제가 현실의 기업 구조를 더 이상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 기업들이 선택한 방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미국이나 제3국으로 본사를 옮기고, 생산 거점을 동남아와 멕시코로 분산하며, 브랜드와 법인 명칭에서 중국 색채를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형식적으로는 규제를 회피하지만, 기술 개발과 핵심 의사결정은 기존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이는 ‘탈중국’이라기보다 중국을 감춘 글로벌화에 가깝다.
이 같은 전략은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미국 정치 환경 변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중장기 포석으로 읽힌다. 미·중 긴장이 상수로 굳어진 상황에서도 미국 시장과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규제의 강도는 변할 수 있지만, 시장 접근성 자체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중국 기업들이 재편한 새로운 공급망 지도는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멕시코는 USMCA를 활용한 니어쇼어링 거점으로, ‘메이드 인 멕시코’ 라벨을 통해 미국 시장에 진입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베트남과 태국은 전자·IT 부품의 최종 조립 허브로 기능하며, 중국산 중간재의 원산지를 전환하는 역할을 맡는다. 싱가포르는 자본과 데이터의 허브로, 글로벌 본사와 투자·데이터 관리의 중심지로 활용된다. 이들 거점은 단순한 생산 이전이 아니라, 규제 적용을 분산시키는 구조적 장치다.
기술 전략 역시 한층 정교해졌다. 소비자 접점에서는 화이트 라벨링을 통해 중국 색채를 지우는 한편, 오픈소스 아키텍처와 표준 경쟁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제품은 바뀌어도 표준과 설계 언어를 장악하면 장기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 같은 우회 전략은 디커플링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정치적으로는 분리를 외치지만, 산업적으로는 공급망이 더 복잡하게 얽히는 ‘재결합’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를 경유한 공급망은 비용 상승과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이를 즉각 차단할 현실적 대안은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디지털 원산지’다. 단순한 생산지가 아니라, 자본·설계·데이터의 출처를 추적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될수록 기업들은 구조를 더 다층화하고 파편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CES 2026에서 중국 기업들의 재등장은 회복이 아니라 진화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상설 조건으로 내재화한 결과다. 국적이라는 외피를 벗고 글로벌 공급망 속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는 주류’가 되려는 전략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기업들 역시 ‘중국 기업이 빠진 빈자리’를 기다리는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경쟁의 본질은 기술력만이 아니라, 공급망과 법인 구조, 정책 리스크까지 설계하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CES 2026은 그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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