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라는 이름으로, 기술과 국가가 인간의 자율을 잠식하고 있다. 요즘 세상은 ‘보호’라는 단어를 앞세운 통제 장치들로 가득하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앱, 정신 건강을 지켜준다는 알고리즘, 심지어는 ‘위험한 생각’을 걸러주는 AI까지.
이제 보호는 안심의 언어가 아니라, 감시의 언어가 되고 있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이 가장 쉽게 악용되는 이유
텍사스주가 내년부터 시행하려는 앱스토어 규제법은, 이 시대의 디지털 부모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미성년자 보호’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부모의 자율권을 박탈하고, 청소년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시민 모두에게 신분 인증을 강제하는 법이다.
아이를 위해 앱을 막는다는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 ‘아이’를 위해 국가가 부모를 대신한다면, 그건 보호가 아니라 대리 양육, 그리고 더 나쁘게는 통제의 정치학이다.
부모의 권리를 빼앗는 ‘기술적 효도’
오늘날의 기술은 점점 더 ‘착한 척’ 하며 인간의 역할을 대체한다. 스마트폰은 아이의 위치를 알려주고, AI는 아이의 정서를 분석해 부모에게 리포트를 보낸다.
모두 ‘사랑’을 포장한 데이터 수집이다. 이른바 디지털 효도(Digital Filiality)의 역전이다. 아이를 위해 부모가 기술을 쓰는 게 아니라, 기술이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관리한다.
부모는 이제 ‘감시의 대리인’으로만 남는다. AI가 아이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말은, 사실상 ‘AI가 당신의 양육 방식을 평가한다’는 뜻이다.
국가와 기술이 손잡을 때, 자유는 어디로 가는가
문제는, 이 ‘보호 시스템’이 국가 권력과 결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텍사스의 법은 단순히 앱을 제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좋은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를 법이 규정하는 시도다.
“좋은 부모는 아이의 앱 설치를 직접 승인해야 한다.”
“좋은 시민은 신분을 인증하고 투명하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구절들이 반복될 때, 국가와 기술은 인간의 윤리적 판단을 대체한다. 그 순간부터 개인의 ‘결정권’은 사라진다.
자유의 역설 — 위험을 피하려다 인간다움을 잃는다
디지털 부모주의의 핵심은 ‘안전’이다. 하지만 그 안전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아이의 사생활, 청소년의 실험 정신, 그리고 부모의 신뢰.
모두 안전이라는 명분 아래 조금씩 사라진다. 결국 남는 건 리스크가 제거된 인간, 즉,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아이를 위험에서 보호하려다, 결국 아이로 하여금 세상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는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디지털 격리다.
기술은 보호자를 꿈꾸지만, 보호받지 않는 건 인간이다
AI와 플랫폼은 늘 말한다.
“당신을 보호하겠다.”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겠다.”
그러나 진짜로 보호받는 건 사용자일까? 아니면, 그 데이터를 모으는 시스템일까?
AI는 부모보다 똑똑할지 몰라도, 사랑할 줄은 모른다. 감시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결정을 그 손에 맡기고 있다. 아이의 스크린 타임, 뉴스의 노출 범위, 심지어 연애 상대까지. ‘보호’를 핑계로 인간의 선택권이 사라지는 중이다.
디지털 보호의 한계선을 다시 긋자
디지털 부모주의의 가장 위험한 점은, 그것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장한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국가는 “아이를 위해서”라 말하며 법을 만든다.
플랫폼은 “당신의 안전을 위해”라며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하지만 그 두 문장의 끝에는 언제나 “그래서 당신은 동의하겠죠?”가 붙는다.
결국 자유는 서명과 클릭 사이에서 사라진다.
‘보호받을 권리’보다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에게 스스로 세상을 경험할 권리를 주는 일이다.
진짜 보호는 감시가 아니라 신뢰에서 시작된다. 진짜 양육은 통제가 아니라 대화에서 완성된다.
기술이 부모를 대신하려는 시대,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아이가 아니라, 인간의 자율성이다.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기술은 많아졌다. 그러나 아이를 진짜로 믿어주는 어른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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